미륵사지 사리장엄구 자유게시판

요약]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는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 중 발견된 유물 일괄로, 사리 외호, 내호, 사리병의 삼중구조로 되어있다. 가장 바깥쪽의 외호는 가로 7.7cm, 높이 13cm의 금동으로 되어있으며, 내호는 순금으로, 사리병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현재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소장하고 있다.

백제의 영웅이 세운 절, 미륵사
28대 혜왕과 29대 법왕의 재위 기간 동안 백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위에서는 고구려가, 옆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건드렸고, 안에서마저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희망은 없을 것 같은 암울함, 그러나 이 어둠을 깨고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이 등장한다.

백제 최대의 혼란기를 수습한 무왕은 선왕들처럼 휘둘리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하여 본인의 리더십을 100% 발휘했다. 그는 백제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자, 백체의 치세를 다시금 빛낸 성군이 되었다.

무왕은 재위 기간 동안 미륵사라는 절을 창건하는데, 이 절은 무왕의 굳건한 치세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백제의 절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무왕은 왜 이 절을 지었던 것일까? <삼국유사>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다가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敬禮)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 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 삼상(彌勒三象)과 회전(會殿), 탑(塔), 낭무(廊惫)를 각각 3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라 하니,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서 도다.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기록을 보면 무왕은 왕비와 함께 길을 걷다 미륵 삼존을 마주쳤고, 왕비의 말에 따라 미륵을 위한 절을 창건했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무왕은 집권 기간 동안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공사들을 많이 진행했다. 미륵사도 그 중 하나이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터만 남아있지만, 미륵사는 신라의 황룡사보다도 2배 정도 넓었고,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3개의 탑을 갖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높은 가운데 탑의 높이는 무려 6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아파트 20층 가량의 높이인데, 당시 동방에서는 가장 높은 탑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운데 탑의 양쪽으로는 그보다 조금 낮은 동탑과 서탑이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 탑과 동탑은 소실되었지만, 서탑은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다.

2009, 정부는 서탑의 복원을 위해 해체하던 중 탑 안에 보관되어있던 사리병과 금제사리장엄구를 발견한다. 이 사리장엄구는 금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만든 것이었다. 높이 13cm 가량의 금동제 사리기에는 덩굴무늬, 꽃무늬, 물고기 알 무늬를 촘촘하게 새겨놓았고, 이보다 더 작은 순금 사리기에는 백제 특유의 문양을 세밀하게 표현해놓았다. 사리장엄구와 함께 발견된 금판은 사리봉안기, 사리를 모시면서 적어둔 글이 주칠로 쓰여 있었다. 이 글의 내용은 백제의 왕후가 남편(무왕)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미륵사 창건에 많은 시주를 했다는 것이었다.
   

미륵사지 사리장엄구가 품은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미스테리
다시 앞의 <삼국유사> 기록을 살펴보자. 이 기록에는 이상한 점이 보인다. 백제와 신라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무렵인데, 신라의 왕인 진평왕은 백공을 보내어 무왕의 미륵사 창건을 도왔다고 되어있다. 왜 진평왕은 백제의 사찰 건립에 신라인 도공을 지원해주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노래에 있다.

신라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서동방을 밤에 안고 간다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 향가, <서동요>이다. 마를 팔던 청년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에게 장가들기 위해 지어 불렀다는 노래, 이 노래에 나오는 서동이 바로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이다. 서동설화의 끝은 다들 알다시피 무왕(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으로 끝난다. 위의 <삼국유사> 기록 또한 서동 설화와 함께 실린 것인데, 진평왕은 자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사위 무왕을 돕기 위해 도공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일국의 왕자가 미천한 신분으로 타국에서 마를 팔게 된 것일까? 사실 서동 설화는 말 그대로 설화이기 때문에 100% 역사적 진실을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제 무왕도 서동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부모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법왕의 아들로 보지만,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지방 귀족이었다는 가설도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사리봉안기를 살펴보면, ‘백제의 왕후가 남편(무왕)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고 되어있다. 설화에 따르면 이 왕후는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여야 한다. 그러나 봉안기에는 왕후의 이름이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되어있다. 사택적덕은 당시 백제 최고의 귀족이었던 사람으로, 사리를 봉안했던 백제의 왕후는 이 사람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던 걸까?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한 학설을 내놓고 있다. 그 중에는 사택왕후가 선화공주 사후 들어온 후비라는 설도 있고, 무왕이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두 사람을 동시에 비로 맞아들였다는 설도 있다. 미륵사지 사리장엄구가 역사학자들에게 또 다른 수수께끼를 선사한 셈이다.

과연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는 서동요 이야기의 거짓을 알리는 열쇠일까? 아니면 오히려 진실임을 증명하는 증거일까? 그 진실은 천년의 금빛을 품은 사리장엄구 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